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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사10월 17일

the Jungs 2020. 10. 18.

오늘의 한국사10월 17일

 

1969 3선 개헌파동

 

3선개헌(三選改憲) 파동:1969년 6월 대통령 박정희의 3선출마를 위한 개헌 움직임이 진행되자 6월 19일 반대학생데모가 시작되었고, 7월 17일 ‘3선개헌 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개헌안은 9월 14일 새벽 공화당 소속 의원만이 모인 가운데 국회 제3별관에서 변칙통과되었고, 10월 17일 국민투표로 가결되었다.

 

1969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안 국민투표

 

3선개헌[三選改憲]
1969년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3선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던 제6차 개헌.
이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결의의 요건을 강화하는 한편, 국회의원의 행정부 장 ·차관의 겸직을 허용하는 것 등이다.

이를 통과시키기 위하여 정부여당은 야당인 신민당 의원 3명을 포섭하여 모두 122명의 개헌지지선을 확보하고, 대한반공연맹 ·대한재향군인회 등 50여 개의 사회단체들을 동원하여 개헌지지성명을 발표하게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에 신민당은 3선개헌에 동의한 의원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하여 9월 7일 당을 해산하는 편법을 사용하여 ‘신민회’라는 이름의 국회교섭단체로 등록하였다.

또한 신민당은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열고 개헌반대투쟁에 나섰다. 한편, 전국 대학가에서는 연일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개헌반대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같은 달 14일 일요일 새벽 2시 국회 본회의장에서 점거농성을 하고 있던 신민회 의원들을 피하여 국회 제3별관에 여당계 의원 122명이 모여 기명투표방식으로 찬성 122, 반대 0표로 개헌안을 변칙통과시켰다.

그 후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총유권자의 77.1% 참여에 65.1% 찬성을 얻어 확정되었으며, 개정헌법은 10월 21일에 공포 및 시행되었다.  

이로써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다시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고, 또 당선됨으로써 1972년 이후 유신체제와 함께 장기집권을 하였다.

 

1972 비상계엄 선포, 유신체제(제 4공화국) 시작

제4공화국[第四共和國]
1972년 10월유신(十月維新)으로 수립된 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의 유신체제와 그 이후에 들어선 최규하 정부 그리고 제8차 헌법 개정으로 제5공화국이 출범한 1981년 3월까지 지속된 대한민국의 네 번째 공화국.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및 정당활동 중지, 헌법의 일부 효력 정지 및 비상국무회의 소집 등의 비상조치를 발표하였다. 정부는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유신헌법을 확정하고 이 법에 따라 같은 해 12월 15일 국민의 직접선거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같은 해 12월 23일 임기 6년인 2,359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1차 회의를 열고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였고, 12월 27일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와 더불어 유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제4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0월유신이며, 유신체제에 의한 통치구조는 입법·행정·사법의 3권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된 ‘절대적 대통령제’였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1/3을 추천하고, 국회해산권 ·긴급조치권 등을 가지며, 임기 6년에 중임할 수 있었다. 게다가 대통령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박정희의 종신집권이 가능해졌다. 반면 국회는 국정감사권이 폐지되고, 연간 개회일수가 150일 이내로 제한되며, 주요권한이 통일주체국민회의로 이양되는 등 그 권한과 기능이 축소되었다.

유신체제는 야당을 포함한 각계각층으로부터 1인 장기독재체제라는 비판을 받았다. 1979년 10월 부산·마산 지역에서 시위가 발생하고,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권총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박정희가 사망한 뒤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한 과도내각이 출범하였고,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전두환(全斗煥)을 중심으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 세력이 장악하였다. 신군부는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표현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계엄령으로 억누르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였다.

1980년 5월 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되어 사실상 내각을 장악한 행정기구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12일 신군부의 압력에 의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였고, 국무총리 박충훈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하다가 8월 29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0월에는 계엄령하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제5공화국 헌법(제8차 헌법 개정)을 확정, 공포하였으며, 11월에는 이른바 '언론 통폐합'과 '정치활동 규제'가 이루어졌다. 1981년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에 의하여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4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제4공화국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부정되고, 정치는 파행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선포, 1975년 1월 22일 유신찬반투표 실시, 1975년 4월 고려대에 군 투입,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총재 제명, 1979년 10월 부산·마산 지역에 계엄령·위수령 선포 등 유신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었다. 그 뒤를 이은 최규하 정부는 무력하였으며,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 역시 군사독재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았다.

반면 제4공화국에서 경제는 꾸준히 성장하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72년 255달러였으나 80년에는 1481달러로 5.8배 증가하였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적 달성과 새마을운동의 확산으로 한국은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중화학공업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수출지향적 정책으로 한국경제의 대외의존도가 심화되고, 성장제일주의 정책으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 외교·통일정책에서는 1973년 6·23특별선언을 통하여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남북한 내정불간섭,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불반대, 북한의 국제기구 참가 묵인, 호혜평등의 원칙 아래 모든 국가에 대한 문호개방 등을 표명하였다.

 

1973 제1차 석유파동

 


석유파동[oil shock,石油波動]

1973~1974년, 1978~1980년 2차례에 걸친 국제석유가격의 상승으로 인해 석유를 소비하는 국가들을 비롯한 세계적 혼란.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原油)의 가격인상과 원유생산의 제한으로 인하여 세계 각국에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났다. 1973년 아랍의 이슬람문명권의 여러국가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아랍지역의 산유국들이 석유생산을 줄이고 가격을 인상하여 서방국가, 특히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을 압박하면서 석유파동이 전세계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석유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인플레이션과 불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때문에 석유자원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후 1978년 이란의 석유생산 축소와 수출 중단으로 세계는 또 한차례 석유파동을 직면하게 되었고 세계경제는 석유 가격에 따라 위기와 호황을 판가름하게 되었다.

1 . 제1차
1973년 10월 6일부터 시작된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이 10월 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비화하여 세계의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1년부터 OPEC는 석유이권(石油利權) 수입의 인상을 추진해 오던 중,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灣)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OPEC(석유수출국기구) 회의에서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하여 종전의 원유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17일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발표함으로서,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결정으로 인하여 서방세계에서는 "에너지 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OPEC의 페르시아만 산유국들은 다시 1974년 1월 1일을 기해 배럴당 5.119달러에서 11.651달러로 인상하였다. 석유에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서방세계의 경제는 석유부족으로 인한 제품생산의 부족과 제품가격의 상승으로 세계적인 불황과 인플레이션을 만연시켰다.

이 결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선진국 및 후진국을 막론하고 경제성장의 둔화를 가져왔다. 외교면에서는 서방세계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친(親)이스라엘에서 친아랍 중동정책으로 기울게 하였으며, 한편 OPEC는 국제석유자본(Oil Major)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원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 제2차
제l차 석유파동의 결과 OPEC는 "석유메이저"가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인플레이션과 달러 가치의 하락을 고려한 실질 원유가격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1978년 12월 OPEC 회의는 1976년 배럴당 12.70달러에서 단계적으로 14.5%의 인상을 결정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2월 말 이란은 국내의 정치 및 경제적인 혼란을 이유로 인하여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시키고 수출을 중단하였다. 이 결과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배럴당 10달러선을 조금 넘어섰던 원유가격은 불과 6년 사이 20달러선을 돌파하였고, 현물시장에서는 배럴당 40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제2차 석유파동이다.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는 제1차 석유파동과 마찬가지로 세계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978년의 4.0%에서 1979년에는 2.9%로 낮아졌다. 물가면에서는 선진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0.3%를 기록하였으며, 개발도상국의 경우 32.0%의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또 석유수입국의 경상수지는 원유수입의 부담 증가로 크게 악화되었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경상수지는 1978년의 116억 달러 흑자에서 1979년 322억 달러의 적자로 반전되었고, 비산유개발도상국은 적자의 폭이 444억 달러에서 505억 달러로 확대되었다.

반면 OPEC 산유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1978년의 240억 달러에서 1979년에는 770억 달러로 급증하였다. 한국의 경제는 제1차 석유파동 때에 다른 국가에 비해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1974년과 1975년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8.0%와 7.1%), 제2차 석유파동 때는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1979년과 1980년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6.4%와 -5.7%). 이는 제1차 석유파동 이후 경제의 체질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화학공업 중심의 확대정책에 중점을 둔 것에 기인한다.

 

1978 제3 땅굴 발견

 

북한이 기습작전을 목적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통로.

전면적 기습전과 후방공략을 달성하기 위한 북한의 땅굴은 2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땅굴사업은 1971년 9월 25일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金仲麟)과 북한군 총참모장 오진우(吳振宇) 등에게 내려진 “속전속결전법을 도입하여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는 김일성의 '9·25교시'에 따라서 시작되었다.

땅굴의 발견경위와 규모는 다음과 같다.

⑴ 제1땅굴: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연천 고랑포(高浪浦) 북동쪽 8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약 1.2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90cm, 높이 1.2m, 깊이 지하 45m, 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전술능력은 1시간에 1개 연대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고, 궤도차를 이용하면 중화기와 포신(砲身)도 운반할 수 있다.

⑵ 제2땅굴:1975년 3월 24일 강원도 철원(鐵原) 북쪽 13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900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2.1m, 높이 2m, 깊이 지하 50~160m, 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아치형 구조물이다. 전술능력은 1시간에 약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가 통과할 수 있다.

⑶ 제3땅굴:1978년 10월 17일 판문점(板門店) 남쪽 4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1.95m, 높이 2.1m, 깊이 지하 73m, 길이 약 1.6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아치형 구조물이다. 전술능력은 1시간에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를 통과시킬 수 있다.

⑷ 제4땅굴:1990년 3월 3일 강원 양구(楊口) 북동쪽 26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1.7m, 높이 1.7m, 깊이 지하 145m, 길이 약 2.1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구조물이다.

 

제3호 땅굴발견

 

2009 매듭 페인팅 신성희 화가 별세

 

신성희[申成熙,1948~2009.10.17]

한국의 화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며 채색한 캔버스를 찢어 접고 묶어서 매듭을 만들어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매듭 페인팅'으로 주목을 받았다.

1948년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나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6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며, 재학중인 1969년 제18회 대한민국예술전에서 특선을 수상하였다. 1971년 대학을 졸업한 뒤 모노크롬회화 작업을 하다가 1980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뒤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파리에서는 "매듭 페인팅"이라고 부르는 독창적 작품활동으로 주목을 끌었다. 처음에는 다양한 색감을 사용한 종이를 찢어서 콜라주 작업을 하다가 나중에는 채색한 캔버스를 가늘게 찢은 뒤 그 조각들을 다시 접고 묶어 매듭을 만들어 입체적 회화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작품들로 입체의 요소를 평면에 끌어들여 3차원의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현지 화단에서도 인정을 받아 프랑스국립현대미술 수장고(FNAC)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의 갤러리현대와 파리의 10대 화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보두앵르봉갤러리 등에서 전속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세계 각국에서 수십 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2009년 9월부터 서울의 소마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리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2014년 판교테크노밸리 축제 환풍구 붕괴 사고

 

2014년 10월 17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신도시에서 열린 제 1회 판교테크노밸리 축제에서 벌어진 대형안전사고. 
해당지역 유스페이스 광장에서 걸그룹 포미닛이 공연 중이던 17시 50분에 인근 건물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환풍구가 붕괴되면서, 공연 관람을 위해 환풍구 위에 올라와있던 사람들중 27명이 지하 18.7m로 추락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최종 집계 16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행사 담당자인 경기 과기원 오모 과장이 사고에 대한 죄책감에 자살해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판교테크노밸리 축제 환풍구 붕괴 사고

 

 

2018년 - 에버랜드에 살고있던 대한민국 유일한 북극곰 통키가 영국 이전 한달 전, 오후 6시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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