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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사 10월 19일

the Jungs 2020. 10. 19.

오늘의 한국사 10월 19일

 

2011년 - 2011 AFC 챔피언스리그 4강전 수원 삼성 블루윙즈 대 알 사드 경기에서 선수들간의 난투극이 일어났다.

 

2011년 10월 19일 AFC 챔피언스 리그/2011년 4강 1차전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알 사드와의 경기중 발생한 초유의 대규모 폭력사태이자 한국의 국제 스포츠 경기 사상 최악의 난투극으로 꼽히는 경기 중 하나다.

 

난투극

 

 

2010년 - SK 와이번스가 삼성 라이온즈를 4승으로 꺾고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10월 15일부터 2010년 10월 19일까지 진행된 한국시리즈.

역대 한국시리즈 상대 중 가장 유사한 팀컬러를 가진 두 팀의 3년 간의 혈전의 시작을 알린 시리즈

정규시즌 1위 SK 와이번스 (84승 2무 47패, 승률 0.632)와,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를 3승 2패로 꺾고 올라온 정규시즌 2위 삼성 라이온즈 (79승 2무 52패, 승률 0.594)가 경기를 치뤘다.

두 팀은 01년 삼성 준우승 (두산 우승) - 02년 삼성 우승 - 03년 SK 준우승 (현대 우승) - 04년 삼성 준우승 (현대 우승) - 05년 삼성 우승 - 06년 삼성 우승 - 07년 SK 우승 - 08년 SK 우승 - 09년 SK 준우승 (KIA 우승) 을 차지할 정도로 2000년대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강팀의 면모를 유지해왔다. 특히 2007년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부터 꾸준히 상위권 단골이 된 신흥강호 SK와 21세기에 우승을 세번 차지한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양팀 모두 좋은 계투진을 가진 팀으로서 팽팽한 투수전이 예상되었으나, 박경완의 리드와 이승호, 정대현, 정우람, 전병두 등의 SK의 불펜진은 너무나 막강했고 반면 삼성은 플레이오프에서 두산과의 혈전으로 체력 소모가 컸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유일한 좌완불펜이었던 권혁과 엔트리에 합류하여 투수진의 숨통을 틔워주리라 기대했던 오승환이 잇달아 무너지면서 투수진이 붕괴했고 거기에 삼성 타자들의 형편없는 타격까지 더해지면서 시리즈 내내 SK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 결국 모든 면에서 SK가 삼성을 압도하면서 통산 3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SK는 이로써 최근 4년간 3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달성했으며 명실상부 해태 왕조, 현대 왕조에 이은 SK 왕조를 건설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2005년 - 삼성 라이온즈가 두산 베어스를 4승으로 꺾고 200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5년에 열린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와 두산 베어스가 2001년 한국시리즈 이후 다시 만나 리턴 매치를 가졌고, 삼성 라이온즈가 4전 전승으로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를 스윕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MVP는 철벽 투구를 선보였던 신인 마무리 투수 오승환이 수상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이 시리즈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걸사마의, 걸사마를 위한, 걸사마에 의한 한국시리즈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정도로 김재걸의 활약은 정말 독보적이었는데, 12타수 6안타 5볼넷 4득점 2타점이라는, 말 그대로 MVP급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삼성은 이런 김재걸의 활약에 힘입어 두산 베어스을 스윕하고 2001년의 패전을 설욕하며 3번째 우승컵을 가져갔다.(코시 기준으로는 2번째 우승) 비록 시리즈 MVP는 철벽 투구를 선보인 오승환이 가져갔지만, 팬들이 뽑은 한국시리즈 최고 선수의 영예(구단 별도시상)는 김재걸에게 돌아갔다. 한국시리즈 MVP를 받아도 전혀 이견이 없을 정도였음은 물론 오히려 한국시리즈 MVP를 타지 못한게 더 아쉬울 정도로 미친 존재감의 진수를 보여줬다 할 수 있겠다.

반면 두산 베어스는 플레이오프에서 3연승으로 스윕하여 호기롭게 한국시리즈에 올라오는데 성공했지만, 위에서 지적한 대로 김재걸의 미친 활약에 휘말려 맥없이 4연패로 스윕당해 무너지고 말았다. 시즌 전적이야 9승 1무 8패로 근소하게 우위에 점하고 있긴 했지만, 막상 시리즈에서는 삼성의 철옹성같은 불펜진에 말 그대로 초살당했다. 두산 불펜진도 당시 시즌 최다 세이브와 최다 홀드를 기록한 정재훈과 이재우가 버티고 있었지만, 둘 모두 삼성 타선에 무너지다시피 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날던 타선도 한국시리즈에서는 극도의 부진에 빠진 것도 컸지만, 종합적인 공,수,주에서 모두 삼성에게 압도당한 것도 사실이다.

 

1991년 -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이 일어났다.

 

1991년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광장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 사건이다. 범인은 20대 시각장애인 김용제(1970 ~ 1997. 12. 30.). 이 사람의 일대기는 책으로도 나왔다. <마지막 사형수>로 교도소 안에서 조성애 쟌 마르코 수녀와 나눈 편지를 바탕으로 제작된 책이다.
2. 경위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김용제는 어릴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때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몇 년 후에 아버지마저 농약을 마시고 음독자살했다. 그후 시각장애와 소극적인 성격으로 집단따돌림을 당했고,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그러던 중 칼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도 예비 음모'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3개월 복역했다. 이후 서울과 부산에서 중국집 배달원, 멍텅구리배 선원, 나이트클럽 웨이터 등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갔지만 시각장애로 인해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없었고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결국 김용제는 마지막으로 다니던 화곡동의 양말 공장에서 해고된 뒤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다.
3. 경과
김용제는 양말 공장을 다니던 시절 사장의 기아 프라이드 열쇠를 복사해서 가지고 다녔고, 그 차를 몰아 복수할 생각을 했다. 결국 1991년 10월 19일, 차를 몰고 여의도 KBS 앞에 나타나 마구 질주했다. 처음으로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지현일 군(12)과 유치원생 윤신재 군(6)을 치었고, 두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뒤에도 계속 질주를 하여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21명이 부상을 입었고, 200m를 더 달리다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은 뒤 차가 멈추었다. 그 뒤 시민들에게 붙잡혔을 때 뿌리치고 여중생 김병춘 양(13, 당시 신도림중학교 1학년)을 인질로 잡았으나 시각장애로 인해 제대로 대치하지 못했고, 이윽고 시민들에게 제압당했다.
4. 결과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 대구의 나이트클럽에서 방화로 인해 16명이 사망하는 거성관 방화 사건이 일어난지라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김용제는 11월 19일 사형판결을 받았으며 이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를 제기하지만 전부 기각됐고, 1992년 8월 1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1997년 12월 30일 다른 사형수 22명과 함께 집행되었다.
여기서 그에게 치여 즉사한 당시 유치원생 윤신재 군의 할머니인 서윤범 할머니는 이런 사정을 듣고 되려 범인을 이해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탄원서를 썼으며, 기도까지 해 주었다. 당시 기도 내용이 얼마전 방송에서 나왔다. "지금도 용제가 정말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작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신다면..." 사형 집행 당일에도 찾아왔다고 한다. 그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여서인지 이 자리에 온 신부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썼는데, 그는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했다고 한다.

<표창원의 사건추적>에 따르면, 정작 해당 살인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생존자나 유족들에겐 보상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이미 1988년부터 '범죄 피해자 구조법'이 시행 중이었으나 법 내용이 미비하고 이 법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범행에 쓰인 프라이드가 가입된 종합보험은 도난 뒤 발생된 피해에 대해 보상해 주는 제도가 없었고, 대신 '책임 보험'에 따라 사망자는 최고 5백만 원, 부상자는 3백만 원까지 보상이 가능했으나, 이들의 아픔은 그마저도 갈음할 수 없었으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스스로 극복해야 했다.

 

1991 소설가 정비석 사망

 

정비석[鄭飛石,1911.5.21~1991.10.19]

소설가. 일제강점기 동안에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였다. 8·15광복 후의 연재소설 《파계승(破戒僧)》등 일련의 애욕세계를 거쳐 《자유부인(自由夫人)》에 이르러 대중소설 작가의 위치를 굳혔다.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신의주중학교 재학중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회운동 혐의가 의심된다고 하여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일명 "신의주고등보통학교생도사건"으로 직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1932년 일본 니혼[日本]대학 문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35년 《동아일보》에 시 《여인의 상》 《저 언덕길》 등을 발표했으나, 1936년 소설로 전향하여 단편 《졸곡제(卒哭祭)》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37년 단편 《성황당(城隍堂)》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되어 데뷔했다. 이후 《애증도(愛憎道)》 《자매(姉妹)》 《제신제(諸神祭)》 등을 발표했다.

1940년 매일신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육군지원병훈련소를 체험한 후 "조선의 청년들이 모두 체험하면 조선에는 광명이 비칠것이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국민문학》(43.4)의 〈국경〉이라는 수필에서 “내가 살고 싶은 곳은……이 내 나라 일본밖에 ……이 지구상의 단 한 곳의 낙원……조국 일본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을 정도로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였다.

8·15광복 후 연재소설 《파계승(破戒僧)》 《호색가(好色家)의 고백》 등 일련의 애욕세계를 거쳐 1954년 《자유부인(自由夫人)》에 이르러 대중소설 작가의 위치를 굳혔다. 1961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위원장이 되었고, 1965년 방송윤리위원, 1971년 한국 라이온스클럽 총재를 지냈다. 1984년에는 《소설 손자병법》을 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외 문학 작품으로는 《청춘산맥》(1949) 《여성전선(女性戰線)》(1951), 《홍길동전》(1953), 《산유화(山有花)》(1954), 《야래향(夜來香)》(1957), 《여성의 적(敵)》(1960), 수필집 《비석(飛石)과 금강산의 대화》(1963), 《여인백경(女人百景)》 등 수십 권에 달한다.

 

1980 송요찬 전 내각 수반 사망

 

송요찬[宋堯讚,1918.2.18~1980.10.18]

한국의 군인. 지리산공비소탕작전 등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고 6·25전쟁 때 서울점령 직전에 한국은행 지금의 진해 반출에 큰 역할을 했다. 주로 동부전선에서 선전했고 군 발전에 기여했으며 5·16군사정변 뒤 군사정변 직후의 제반 문제를 처리했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충남 청양(靑陽)에서 태어났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창군(創軍)에 참여했으며, 1948년 육군보병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1954년 미국참모대학, 1957년 국방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49년부터는 지리산공비소탕작전 등에 참가했고, 6·25전쟁 때 서울점령 직전에 헌병사령관으로서 한국은행 지금(地金)의 진해 반출에 큰 역할을 했다. 수도사단장이 된 후로는 주로 동부전선에서 선전하였으며, 특히 40여 일에 걸친 수도고지 협전에서는 북한군·중공군 등 적군 2개사단을 섬멸하는 전공을 세우고, 1952년 소장 진급과 동시에 제8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54년 제3군단장을 거쳐 1957년 제1군사령관에 발탁되었으며, 1959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정군·군인연금제도 신설 등 군 발전에 기여했고, 4·19혁명 때는 계엄사령관으로서 중립적 입장을 취해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크게 활약하고, 육군중장으로 전역하였다.

5·16군사정변 뒤 미국에서 수학 중 귀국, 1961년 국방장관 겸 최고회의 기획위원장에 발탁되어 군사정변 직후의 제반문제를 처리하고, 이어 내각수반 겸 외무부장관, 1962년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같은해 내각수반직을 사퇴하고, 1963년 박정희의 대통령 출마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가 구속되기도 하였는데, 그해 대통령 선거에 자유민주당후보로 옥중출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다시 친정부노선으로 전향, 1970년 인천제철 사장에 취임하고, 1980년 국정자문위원이 되었다.

 

1977 서양화가 도상봉 사망

 

도상봉[To Sang Bong,都相鳳,1902.1.6~1977.10.19]

한국의 서양화가. 일생동안 아카데믹한 자연주의 시각을 견지하며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관조의 태도로 조화와 균형의 미를 보여주었다. 백자 항아리에 담긴 국화, 라일락 등 꽃을 소재로 한 정물화와 고적한 분위기의 풍경화를 주로 그렸으며,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고전적 사실주의와 한국적 아카데미즘의 원형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도상봉(都相鳳)은 1902년 함경남도 홍원(洪原)에서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고희동(高羲東)으로부터 서양화법을 배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작품과 가르침은 그에게 새로운 시각적 자극을 주었고, 이는 후에 그가 본격적으로 서양화가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에 건너간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2년 동안 수학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1923년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도상봉은 도쿄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일본에 유입된 서구의 아카데미즘에 영향을 받았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필획과 밝고 안정된 색조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은 일본 유학시절 그의 지도교수였던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의 영향을 보여준다. 구로다는 프랑스에서 라파엘 콜랭(Raphael Collin)에게 배워 밝은 외광을 중시하는 인상파의 화풍을 일본 화단에 도입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화가이다. 오카다 사부로스케(岡田三郎助) 역시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는데 부드러운 미풍처럼 화면을 감싸고 흐르는 은은함은 오카다의 화풍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후지시마 다케시(島武二)의 생기 있고 기품 가득한 화풍도 도상봉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멋이다.

귀국 후 도상봉은 일본인들 주도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같은 당시의 미술전람회 등에서 활동하기보다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경신고보, 보성고보, 배화여고, 경기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31년에는 숭삼화실이란 유화교실을 열기도 했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던 그는 1945년 광복 이후 그간의 은둔자적 태도에서 벗어나 화단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1948년 ‘대한미술협회’ 창립 멤버로 참여했으며, 1949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창설에 가담하여 제1회 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일선 미술행정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도상봉은 자신의 일생을 일관하여 아카데믹한 자연주의의 시각을 견지한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그림에 대해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으며, 확고한 고전주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이를 분석하여 철저하게 대상을 이해하고자 했다. 또한 탄탄한 데생과 엄격한 구도를 기반으로 작품에 빈틈을 허용하지 않고 원칙에 충실했다.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깊이 있고 무게감 있는 색조, 그리고 구도의 안정감은 정지된 사물의 한순간을 포착해 보는 이로 하여금 고요와 관조의 시간을 갖게 한다.

도상봉은 ‘회화는 생활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그의 사고를 반영하듯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를 즐겨 그렸다. 인물화는 비교적 드물게 그렸는데, 일반적인 미의식에 집착하기보다는 조각처럼 잘 짜여진 인물 표현이 돋보인다. 풍경화에서는 비원, 광릉, 성균관 등 고궁이나 전통 가옥을 대상으로 고적하고 우아한 멋을 담았다. 정물화는 작품 제작 전 시기에 걸쳐 두루 나타나며, 특히 도상봉의 말기 작품에서 자주 보게 된다. 조선백자를 사랑해 ‘도자의 샘’이라는 뜻의 도천(陶泉)으로 호를 삼을 만큼 도자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백자에 담긴 화사한 꽃을 많이 그렸다. 라일락, 개나리, 코스모스, 안개꽃 등이 부드러운 선과 은은한 색조, 견고한 조형미를 갖춘 백자와 어우러진 풍경은 격조 있는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도상봉은 1960년 예술원 회원, 1965년에 국제조형 작가회의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3.1문화상(1960), 예술원상(1964),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1970),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0) 등을 수상했다. 그는 1977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의 작품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고전적 사실주의와 한국적 아카데미즘의 원형을 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주요 작품에는 《명륜당》(1933), 《한정》(1949), 《출가전(出嫁前)》(1953), 《정물》(1954), 《항아리와 국화》(1954), 《라일락》(1958), 《코스모스》(1958), 《성균관 풍경》(1959), 《개나리》(1968), 《설경》(1969), 《비원풍경》(1973), 《안개꽃》(1974) 등이 있다.

 

1973 서울대 최종길 교수 의문사

 

최종길[崔鍾吉,1931.4.28~1973.10.19]

한국의 법학자이자 교육자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정교수를 지냈으며 유신헌법 반대시위 학생들의 체포, 연행에 항의를 제안한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받았다.

1931년 4월 28일 충청남도 공주(公州)에서 태어났다. 제물포고등학교를 거쳐 195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1957년 동대학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스위스로 유학해 취리히대학교 법과대학을 거쳐 1961년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해 훔볼트 장학재단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이듬해 2월까지 쾰른대학교 외국사법 및 국제사법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이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몸담아 1967년 법과대학 학생과장, 1970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환교수, 서울대학교 법학도서관장을 지낸 뒤, 1972년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정교수를 지냈다.

1973년 10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회의에서, 유신헌법에 반대해 시위를 벌인 법과대학생들의 체포·연행·구금에 대해 총장이 문교부장관에게 항의하도록 제안한 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유럽거점간첩단사건에 관한 수사협조를 요청하자 10월 16일 스스로 중앙정보부로 찾아간 뒤 10월 19일 중앙정보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중앙정보부는 10월 25일 "스스로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중앙정보부 건물 7층에서 투신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74년 12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전기고문에 의한 타살로 규정한 뒤, 이듬해 한국기독교교수협의회와 독일 쾰른대학교 교수들의 진상규명 촉구에 이어, 1988년 10월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고문치사 진상규명에 대해 검찰에 제소하였다. 그러나 10월 18일 검찰에서는 공소시효 만료일(1988.10.16)이 지나 증거를 포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사 중단을 발표하였다.

2000년 10월 대통령 직속 한시적 기구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한 뒤, 2002년 5월 27일 동 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으므로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구제조치를 취한다"고 결정함으로써 민주화운동가로 인정받았다. 그가 숨진 뒤 《한국의 법학자:최종길 편》(최종고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1988), 《유신사죄 외친 참 지식인》(대한매일신문, 1998) 등이 출간되었다.

 

1948년 -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여수·순천 10·19 사건 또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로 출동하여 자국민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물론 명분은 동족상잔이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 저 둘은 병사 소비에트라는 남로당 소속 세포 조직의 조직원들이었다. 최종적으로 9일만인 10월 27일에 진압된 사건으로, 반란군과 진압군 양측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로 논란을 빚었다.

한때는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해서 공식 명칭에서 반란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다른 명칭으로는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또는 '여순군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려수군인폭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2013년 기준 우리민족끼리에 적혀있던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주둔 군부대의 사병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니까 〈남부군〉을 쓴 이태가 신동아에 기고한 실록의 제목도 이것이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6.25 전쟁 이전부터 치안유지법을 국가보안법으로 개정하고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의 국가를 구축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박정희 정권과 이후 군사정권 기간 내내 철저한 반공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근거로 오랜기간동안 사용되었다. 정부 측의 학살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역사학계에서 공공연하게 밝히기 시작한 것은 거의 60년이 지난 후였으며, 그 전까지 교과서는 물론 모든 매체에서 일방적으로 반란군의 탓으로 돌려왔다.

물론 반란군에 대한 역사왜곡은 금물이다. 사건의 전후로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

 

 

1894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출생

 

최현배[崔鉉培,1894.10.19~1970.3.23]

한글학자로 호는 외솔이다. 조선어학회 창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에 참여,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하였다. 광복 후 교과서 행정의 기틀을 잡았다. 연세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는《우리말본》,《한글갈》,《글자의 혁명》등이다.

본관 경주(慶州). 호 외솔. 1894년 10월 19일 경남 울산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1910년부터 3년간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원자격증을 받았으나 관공립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조선인 상권(商權) 확보를 위하여 공동상회(共同商會)를 설립하였다. 1920년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 다시 수학, 이어서 교토[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25년 동대학원에서 1년간 수업하였다. 1926년 연희전문 교수가 되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강제 사직하였다.

그 동안 이화여자전문 교수도 겸직하였는데 실직한 동안 한글 연구의 완성을 위해 《한글갈[正音學]》을 발간하였고 1941년 연희전문에 복직, 도서관에 근무하였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8·15광복 때까지 3년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교과서 행정을 담당, 그 기틀을 잡았으며 이어 한글학회 상무이사·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1년 다시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다가 1954년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로 돌아가 교수·문과대학장·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에 《우리말본》《한글갈》《글자의 혁명》《나라 사랑의 길》 등이 있다.

 

1405 창덕궁 완공

 

창덕궁[Changdeokgung Palace,昌德宮]

1405년(태종 5) 지어진 조선시대의 궁궐. 사적 제122호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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