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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사 10월 18일

the Jungs 2020. 10. 18.

오늘의 한국사 10월 18일

1950 고당 조만식 사망

 

기억록 서장훈, 조만식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조만식[曺晩植,1883.2.1~1950]
한국 정치가 겸 독립 운동가.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1943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했다.

본관 창녕(昌寧). 호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 재학 중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M.K.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있다가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직하고 3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1923년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그 후 숭인중학(崇仁中學)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關西)체육회 회장,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하다가 한때 구금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越南)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하였다. 그 후 6·25전쟁이 발발한 뒤 퇴각하는 북한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북한 내무성에서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살해된 날짜에 대해서는 1950년 10월 15일이라는 설과 1950년 10월 18일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1991년 유발(遺髮)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79년 - 부마민주항쟁: 부산과 마산에 계엄령이 선포되다.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1979년 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金泳三)이 총재로 당선된 후 정국은 여야격돌로 더욱 경색되었다.

이어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 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 10·26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결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이념을 계승한 민주항쟁의 하나로 평가받으며, 2019년 9월 17일 부마민주항쟁  발생일인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2005년 -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이 개통되었다.

 

대구광역시 지역에서 운행되는 도시철도 체계의 교통시설로서 1997년 11월 26일 1호선 진천역~중앙로역이 1단계로 개통되었다. 이후 1998년 5월 1호선 전구간이 개통되었고, 2005년 10월 2호선이 개통되었으며, 2012년 9월 2호선이 연장개통되었다. 2015년 4월에는 3호선이 개통되었다. 1~3호선 3개 노선의 89개 역 81.25㎞를 운행하고 있으며, 대구도시철도공사가 운영한다.

1989년 9월 1일 대구직할시청 산하의 지하철기획단이 발족하였고, 1991년 1월 지하철 건설·운영의 기본계획이 수립되었다. 같은 해 4월 지하철기획단이 지하철건설본부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12월 7일 1호선 건설에 착공하였다. 1997년 11월 26일 진천역~중앙로역을 잇는 14개 역 10.3㎞의 1단계 구간이 개통된 데 이어 이듬해 5월 2일 중앙로역~안심역을 잇는 15개 역 14.6㎞의 2단계 구간이 개통되었다.

2002년 5월 10일에는 대곡역~진천역의 1㎞ 연장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대곡역~안심역을 잇는 총연장 25.9㎞의 30개 역이 영업을 하고 있으며, 반월당역에서 2호선과 접속하여 환승할 수 있다.

1호선은 기점인 대곡역에서 화원읍 방면으로 2.3㎞ 구간을 연장하고 2개 역을 신설하는 사업과 종점인 안심역에서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의 하양역까지 8.75㎞ 구간을 연장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한편, 중앙로역에서는 2003년 2월 18일 지적장애인의 방화로 인한 대형 화재가 발생하여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2호선은 대구광역시 시가지 서부에서 도심을 거쳐 시가지 동남부를 연결하는 노선이다. 1996년 12월 19일 착공되어 2005년 10월 18일 문양역~사월역을 잇는 총연장 28㎞의 26개 역 구간이 개통되었다. 2012년 9월 15일 사월역에서 영남대역 구간이 연장 개통되면서, 총연장 31.4㎞의 29개 역 구간이 완전 개통되었다.

3호선은 북구 동호동의 칠곡경대병원역에서 수성구 범물동의 용지역을 잇는 30개 역 23.95㎞ 구간의 경전철 노선이다. 2009년 7월 24일 착공하였으며 2015년 4월에 개통되었다. 대구지하철의 건설은 대구광역시 산하의 도시철도건설본부가 담당하고 있으며, 운영은 대구도시철도공사가 담당하고 있다.

 

2014년 - 2014 인천 장애인 아시안 게임이 개막했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 연이어서 개최했던 경기 대회다. 종목은 패럴림픽 종목 19개에 배드민턴, 론볼, 볼링, 휠체어 댄스 스포츠를 추가해서 총 23개 종목으로 치뤄진다. 마스코트는 저어새를 모티브로 한 '저노피'와 '드노피'다.

장애인 아시안 게임 사상 최초로 북한도 참가한다. 북한 선수단은 첫번째로 선수촌에 입촌했다. 이렇게 해서 아시아장애인올림픽위원회 42개 회원국 중에서 방글라데시를 제외한 41개국이 참가힌다.

이 대회도 역시 저예산으로 치뤄진다. 인천 아시안게임 예산의 1/5이다. # 이번에도 망신 당하지 않게 조심하자

개, 폐막식 감독은 박칼린 감독이다. 개막식은 장애인 선수들의 편의를 위해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이 아니라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열렸다. # 사실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개최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문학경기장에서 점화된 성화는 아시아드주경기장으로 옮겨진다. 개막식의 평가는 인천 아시안게임 때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1 2

개, 폐막식을 제외한 모든 경기의 입장료는 무료다.

우리나라 선수단은 금메달 72개로 종합 2위를 했다. 1위는 역시나 중국이고 3위는 일본이다.

 

2016년 -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가 14년 역사를 마감하고 사라졌다.

 

2003년부터 2016년까지 KeSPA 주최로 개최되었던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팀 단위 e스포츠 리그.

 

갓이 말하는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역사 : 드래프트 세대들의 프로리그!


원래는 온게임넷이 주관하는 대회였으나, 경기수 과다로 인한 선수혹사와 시청률 불균등 현상 등을 이유로, 온게임넷의 프로리그와 MBC GAME의 팀리그를 통합하여 만들어졌으며, KPGA도 KeSPA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이 흐름이 12~13 시즌까지 이어져 왔다.

2003년 KTF EVER 프로리그와 네오위즈 피망 프로리그에서는 1, 3세트 개인전 2세트 팀플레이 방식으로 진행했으며 경기는 승부에 관계없이 무조건 3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2:0 상황이 돼버린다면 이미 승패가 갈린 상황이라 세트 득실까지 가지 않는 이상 지루한 경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피망 프로리그는 같은 날 MBC GAME에서 진행했던 KT-메가패스 네스팟 프리미어 리그에게 시청률로 처참하게 관광당했다.

그래서 2004년 SKY 프로리그는 대대적인 개편을 하게 되는데 정규 시즌은 전 시즌과 같은 3전 2선승제지만 2:0이 나오면 그대로 종료가 되는 것으로 변경되었으며 각 라운드 우승팀과 1~3라운드에서 가장 좋은 정규 시즌 성적을 보여준 와일드카드 한 팀, 이렇게 네 팀이 그랜드 파이널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1라운드는 1세트가 팀플레이, 2라운드는 2세트가 팀플레이, 3라운드는 3세트가 팀플레이로 진행되었다.

2005년도부터 2007년까지는 전기리그+후기리그+통합 챔피언전 체제로 나갔으며 5세트에 개인전 3경기 팀플 2경기로 한 경기를 치렀고 플레이 오프나 결승에서는 7세트에 개인전 4경기 팀플 3경기 방식으로 치렀다. 이후 팀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2006 시즌부터는 팀플 경기 수가 정규 시즌에는 1경기로, 플레이 오프에서는 2경기로 대폭 줄어든다. 그리고 2007년에는 다소 프로리그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는데, 우선 연초에는 한국e스포츠협회가 중계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서 양대 방송사와 갈등을 빚었던 위기의 시기였다. 이는 프로리그 중계권 사태를 참조하면 된다. 그리고 게이머들의 경기력 향상과 더불어 시청자들의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 사전 엔트리 예고제가 도입되고, 토, 일, 월, 화, 수 주 5일동안 진행하게 되었다.

2008년에는 프로리그의 전통이었던 광안리 결승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기 위하여 연간 프로리그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8년 전반기에는 전기리그가 아닌 그냥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로 반년동안 진행하게 된다. 2008년 10월 4일부터 08-09 시즌으로 개편, 5라운드의 풀 리그로 진행하기로 하고, 1, 2, 4, 5라운드는 기존 사전 엔트리 예고제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3라운드는 위너스리그라는 이름으로 과거 MBC GAME 팀리그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자 팀배틀 방식을 도입하였다. 위너스리그는 독립적으로 순위를 정하여 위너스리그만의 포스트시즌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명칭은 다른 수식어 없이 스폰서 이름+프로리그 라는 형태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이것은 온게임넷이 처음 KTF EVER CUP 프로리그를 시작할 때 '프로' 팀들이 참여하는 리그라는 의미로 '프로리그'라는 명칭을 사용한 게 그대로 이어진 것. 결국엔 지적재산권 문제로 인해 공식 명칭이 '프로리그'에서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로 변경되었고, SK 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시즌 1부터는 항상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2010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신한은행과의 스폰서 기간도 종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eSTRO 팀을 맡고 있는 IEG가 e스포츠 시장에서 손을 떼었고[5] 팀도 해체되었으며, 조정웅, 조규남, 하태기 감독 등이 팀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고, 그 여파로 선수들이 많이 연루된 하이트 스파키즈까지 CJ 엔투스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거기에 KeSPA와 그래텍과의 협상도 결렬 상태에 빠지며 당장 10-11 시즌에 프로리그의 개최 여부조차 의문시되고 있다.

KeSPA는 그래텍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프로리그 강행도 불사하겠다고 하고 있으나, 만에 하나 실천에 옮길 경우에는 오히려 멸망을 재촉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협상을 전제로 하고 있는 리그 마치라고 유예 기간까지 준 상황인데 KeSPA에 의해 프로리그가 강행되는 것을 그래텍이 봐 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면서 리그 파행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승 오즈와 위메이드 폭스가 게임단 운영에 손을 떼었고, MBC GAME HERO도 모기업의 음악 방송 전환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다행히도 KeSPA가 해체된 팀들의 우수 선수들을 따로 모아서 제8게임단을 만들어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이러한 부침의 시기 동안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는 SK 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시즌 1으로 재개되었고, 이 리그는 브루드 워로만 진행된 최후의 프로리그가 되었다.

이후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2 프로리그 시즌 2는 스타크래프트 2가 붙었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브루드 워에서 스타크래프트 2로 전환됨을 천명하는 리그였다. 다만 기존 팬층의 급격한 이탈을 우려, 전반 브루드 워, 후반+에결 스타 2로 진행하는 병행 방식이라는 초유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데일리E스포츠 이러한 진행 방식에 대해서 기존 브루드워, 스타 2 팬층 모두 의구심을 드러냈으나, 어차피 스타 2로 전환해야 할 상황에서 브루드워 시절의 팬들을 한 명이라도 더 끌고오는 게 이득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병행의 결과는 결승전의 관객 수에서 나타나듯이 흥행 참패로 나타났고 여러 프로 팀들이 해체설이 돌거나 정말로 해체를 선언하는 마당에 앞으로 프로리그가 정상적으로 열릴 수 있을 지는 미지수로 보였다.

이후 스타 2로 완전 전환된 첫 시즌인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2 프로리그 12-13부터는 다시 7전 4선승제와 연간 프로리그로 진행되었다. 또한 이 시즌부터 SPOTV가 프로리그 중계에 참여하여 평일을 담당, 인텔 e-스타디움을 경기장으로 활용했다. 물론 주말에는 온게임넷이 기존의 용산에서 진행. 이 리그의 경우 결승을 마지막으로 팀을 해체한 STX SouL과 웅진 스타즈의 맞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면서 결승 폭망은 면했지만, 페넌트레이스 기간 동안 관객 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것이 훤히 보일 정도로 처참한 시즌이기도 했다. 특히 처음으로 프로리그 중계를 맡은 SPOTV는 인텔 e-스타디움의 안습한 여건+김철민, 한승엽, 유대현의 처참한 해설 등으로 온게임넷과 비교당하며 극딜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첫 시즌부터 호된 신고식을 치른 SPOTV는...

SK텔레콤 스타크래프트 2 프로리그 2014에서는 온게임넷이 자신들이 만들어 낸 프로리그의 중계에서 손을 떼는 대격변이 일어나면서, 지난 시즌 함께 프로리그를 중계했던 SPOTV가 단독으로 중계하게 되었다. 아울러 SPOTV 또한 eSTRO 시절을 잊지 않았는지 e스포츠에 대한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번 시즌부터는 SPOTV의 게임 전문 채널 SPOTV GAMES에서 프로리그의 전 경기를 중계하게 되었다. 아울러 경기장 또한 넥슨과 반반 출자를 통해 만들어진 넥슨 아레나로 전환.

한편 연맹에서 탈퇴한 3팀이 합류하여 다시 8팀 체제가 되었으며, 선수층이 얇아진 일부 팀들의 사정을 감안해 7전 4선승제에서 다시 5전 3선승제로 복귀하였다. 이번 시즌에서 SPOTV GAMES는 준수한 운영 능력으로 페넌트레이스에 이어, 통신사 매치라는 희대의 결승 대진을 세빛섬에서 야외 중계로 성사시키며 프로리그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단 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유대현, 고인규 해설의 성장이 돋보였고, 스 2에 조예가 깊은 채민준 캐스터의 발굴 또한 커다란 성과. 이유라는... 그냥 잊자

2015 시즌 또한 SK 텔레콤이 스폰을 맡게 되었고, SPOTV GAMES 단독중계인 것도 동일하다. 다만 해외대회 출전을 고려하여 월, 화 평일에만 중계되며, 김철민 캐스터는 프로리그에서 하차하여 고채유 조합으로만 진행된다. 아울러 KeSPA에서는 해외 팀들의 프로리그 참여 검토에 나섰다. 실제로 KeSPA에서는 Teamliquid 사이트에 해외 팀들의 프로리그 참전과 관련해서 의견을 묻는 글을 올리는 것으로 반응을 살피고 있다.

결과적으로 해외 팀 참여는 연합 형식으로 참여한 yoe Flash Wolves뿐이었다. 역시 비협회팀으로, 프로리그에 처음 참여하는 StarTale과 연합을 구성하여 ST-Yoe로 출전한다. MVP의 경우, Invasion Esport와의 연합이 예상되었으나 없던 일이 되었다.

2016 시즌은 역대 최소 구단 (7구단) 으로 프로리그를 치뤘고, 시즌 초부터 시즌 후반까지도 악재가 쌓이고 겹쳐서 정말 굉장히 서러운 대회가 되었는데, SK텔레콤 스타크래프트 2 프로리그 2016 참조.


여담으로 스타2로 완전히 전환한 프로리그 (프로리그 12-13) 이후 우승팀의 모기업들이 (통신사가 아니면) 나름대로의 잔혹사를 쓰고 있다는 징크스가 있다. 12-13 당시 우승팀이었던 STX SouL은 우승후 바로 모기업인 STX가 폭망해버렸고, 그 해 준우승팀이었던 웅진 스타즈마저도 시즌 후 웅진그룹(정확하게는 그 안의 계열사인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팀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후 대회에서는 통신사 팀들이 결승진출/우승을 하면서 (2014 SKT:KT - KT 우승 / 2015 SKT:진에어 - SKT 우승) 징크스가 없는 듯 했으나, 2016 시즌 진에어 그린윙스의 프로리그 우승 이후 모기업인 한진그룹이 한진해운 법정관리 사태를 일으키며 폭망조짐이 보이면서 이 징크스가 다시 언급되는 상황.

2016년 10월 18일 결국 케스파에서 프로리그의 종료를 선언했다.기사 이에 따라 스타 2 프로게임단인 SK텔레콤 T1, KT 롤스터, CJ 엔투스, 삼성 갤럭시, Afreeca Freecs의 운영이 종료되며, 그로 인해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로 진행되었을 때부터 온게임넷을 통해 프로리그를 봐왔던 팬들은 여러 아쉬움으로 각종 사이트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진에어 그린윙스, MVP는 존속된다지만 사실상 프로리그 폐지와 함께 대다수 구단들도 스타2 부문 해체에 들어가면서 수많은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들의 거취가 불분명한 상황.

프로리그의 폐지로 인해 이미 김명식이 오버워치로 종목 전향을 하는 등 주축 선수들의 대규모 은퇴, 종목 전향으로 인한 리그 규모 축소가 기정사실화되면서 그나마 남은 스타 2로 치러지는 양대리그의 전망조차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은퇴 후 e스포츠를 떠나 군복무 후 진로를 모색하는 등 다른 길을 찾아갈 수도 있겠으나, 사실상 지속적으로 스타2를 하려면 한국에서 몰락한 워크래프트 3 종목의 장재호, 박준 등과 비슷하게 자신의 주 종목의 해외 대회를 찾아 다녀야 할 처지이다. 그러나 RTS 장르 자체가 2000년대 후반부터 쇠퇴를 거듭한 끝에 해외에서도 스타2 리그가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특히 워3 같은 경우는 중국에서 리그들이 크게 활성화되어 있는 반면 스타2는 중국에서도 부진한 상황이다.

그나마 전직 선수들이 아프리카에서 스타2보다는 스타1으로 방송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과 스타2 리그를 지속하기보다는 스타1 리그 부활을 원하는 올드팬들도 있어서 스타2 선수들이 대규모로 개인방송을 시작하며 스타1으로 재진출할 수도 있고, 아프리카TV 스타리그가 지속적으로 열리며 스타1도 리마스터 버전이 출시되었지만 기존의 선수들과 올드팬들을 제외하면 새로운 선수들이나 팬들의 유입도 사실상 끊겼기 때문에 리그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는데다 스타2 게임단들이 스타1 재전환이 아닌 운영 종료나 오버워치 등 다른 종목으로 전환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이는 스타1의 공식리그가 부활할 가능성이 낮은것을 의미하기에 스타1, 2를 막론하고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자체가 저물어 간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팬들이 대부분이다. 설령 다시 프로팀이 창설 된다 한들, 스타1 게이머 수급도 부족한데다, 팀별 밸런스, 또 이에 참여할 의사가 없는 전 프로게이머들 등의 문제로 프로리그가 다시 재개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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