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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사 10월 16일

the Jungs 2020. 10. 16.

오늘의 한국사 10월 16일

 

1907 지리학자 육지수 출생

한국의 경제지리학자이자 교육자. 서울대 문리대에 지리학과를 신설하였고 교수로 재직하였다. 경제지리학과 인구문제 연구에 주력하였으며 대한지리학회의 창설회원으로 부원장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옥천(沃川), 호는 석전(石田)이다. 190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본 제8고등학교를 거쳐 1933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도쿄제국대학의 잠사(蠶絲)경제연구실에서 조수로 3년 동안 근무하였다.

1936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경성제국대학 예과 강사를 지냈다. 광복 후인 1946년 이후 서울대학교 상과대,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1955년에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임명되었다. 1958년 서울대 문리대에 지리학과를 신설하여 교수로 재직하였다. 경제지리학과 인구문제 연구에 주력하였으며, 1960년 이후 학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1964년 한국사회사업대학(지금의 대구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한지리학회의 창설회원으로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서울대 신문연구소장과 사단법인 인구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냈다. 저서에 《통계학개론》《경제지리학》《한국과 세계》 등이 있으며, 20여편의 논문과 단문 등을 엮은 《석전육지수교수 유고문집》이 있다.

 

육지수

 

1928 독립운동가 박용만 베이징에서 피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909년 미국 내에서 최초로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는 등 무력에 의한 독립 쟁취를 주창하였다. 《신한민보》《신한국보》등의 주필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우성(又醒), 이명은 용필(容弼)이며, 1881년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태어났다. 1895년경 일본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에서 중학을 졸업한 뒤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고,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고 활빈당에 가입하였다. 1901년 귀국한 뒤 활빈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보안회(輔安會) 간부로서 일제의 조선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평안남도 순천에서 사립 시무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05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6년 네브래스카주의 헤이스팅스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였고, 1909년 네브래스카 주정부의 허락을 얻어 한인 농장에 미국 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였다.

1910년 한인소년병학교를 헤이스팅스대학 구내로 이전하고 군사훈련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으며, 1912년 제1회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다. 1911년 재미동포 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활동하였고, 이 시기에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과 《군인수지(軍人須知)》 등의 저작을 통하여 독립을 위한 무장항쟁론을 역설하였다.

1912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이 되어 하와이로 건너간 뒤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받아 한인자치제를 확립하였으며, 1914년 농장을 임대하여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결성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15년에는 《아메리카 혁명사》를 한글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1917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동맹회의(弱小國同盟會議)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듬해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를 창간하여 국제정세 홍보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수립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9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각처의 임시정부를 통합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할 때도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독립군을 통합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는 노선을 견지한 그는 임시정부 수반인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노선에 반대하여 상하이로 부임하지 않고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申采浩)·신숙(申肅) 등과 함께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결성하였다. 1922년 중국 톈진[天津]에서 대일 무력투쟁을 호소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여 창조파(創造派)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 불신임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듬해 창조파의 중심 인사들이 결성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비서처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1925년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태평양 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이듬해에는 독립운동의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베이징 근방의 땅을 매입하여 대본농간공사(大本農墾公司)를 설립하였다.

1927년에는 호놀룰루의 팔라마 지방에 우성학교를 설립하고 교포 청소년들을 위하여 국어 교과서인 《조선말 독본》을 직접 편찬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 1928년 베이징에서 대본농간공사 사업을 추진하던 중 의열단원 이구연(李龜淵)에게 암살당하였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변절설, 일본밀정설, 호화생활설 등이 떠돌기도 하였으나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며, 일제나 정적들이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1995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갈라선 의형제 박용만과 이승만

 

1979년 - 대한민국에서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되다.

1. 개요
釜山·馬山民主抗爭 / Busan–Masan Democratic Protests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시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 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유신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배경
197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 독재를 무너뜨릴 정치적 기회조차 사실상 박탈당하자 시민들은 사회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역으로 정부는 이를 누르기 위해 더 학생, 시민운동을 탄압했다. 당시 미국은 지미 카터 대통령이 박정희 정부의 인권 문제를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한미관계도 역대 최악이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1차 오일쇼크로 물가상승률이 크게 오르면서 경제위기도 봉착했다. 그나마 1차 땐 중동에서의 대규모 건설사업 수주로 수십억 달러의 외화가 들어와 어찌어찌 넘어가나 싶었지만, 이것 역시 투자조정에 실패하면서 중화학공업이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중소기업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되었고, 이와중에도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두자릿수대를 기록하며 경제성장률을 추월할 지경이었다. 여기에 부동산 폭등과 물가가 안정되지 않던 상황에서 도입된 부가가치세는 물가상승률을 높여주는 요인이 되며 서민들의 반발을 극심하게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1978년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경제에 다시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2차 오일쇼크까지 닥치면서 물가상승률은 20%대까지 오르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중공업에 비해 자금 우선순위가 떨어졌던 경공업이 중심이 된 부산, 마산 지역의 많은 중소업체들은 이러한 타격의 직격탄을 받는다. 이렇듯 당시의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신설 등의 여파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남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요인은 이후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 결과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을 포함한 무소속이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을 앞서는 등 크게 약진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민주공화당은 부가세 도입을 주도한 이들에 대한 책임론을 강하게 들고 나왔고, 대통령 박정희는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경질하는 개각을 단행하였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유신정우회의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앉히면서 국회를 통제하려 하였다. 이런 와중에 1979년 5월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선출된다. 그리고 강경 대여노선을 취하며 과감하게 대여/청와대 투쟁을 하게 된다.


이때 YH 사건이 일어나고 신민당은 당사를 노동자들에게 내주었는데, 박정희와 여권은 40시간 이상 당사를 내준 것에 김영삼을 배후로 의심하였다. 어쨌든 결말은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과정이 벌어져, 당사에 경찰이 들어가 야당 의원 등과 실랑이를 벌이며 진압 작전을 벌이던 중 당시 21세 여공 김경숙 양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와중 신민당에서는 내분이 발생해 유기준, 윤완중, 조일환 등 신민당 원외 지구당위원장 3명은 5월 전당대회에서의 대의원 몇 명의 자격을 문제삼아 서울지방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했고, 전당대회 의장이던 정운갑이 총재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12일 김영삼은 뉴욕 타임스지와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김영삼 의원은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줄 것이며 이를 위해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고, 이에 발끈한 여권은 국회의원으로서 품위를 잃은 사대주의적인 망동이라며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키게 되고, 야당이 항의의 표시로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의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자 민주공화당은 선별적 수리를 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조진웅이 들려주는 부마민주항쟁이야기

 

1999년 - 대한민국이 상록수 부대를 동티모르에 파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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