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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사 10월 13일

the Jungs 2020. 10. 13.

오늘의 한국사 10월 13일

1991년 - 해태 타이거즈가 빙그레 이글스를 4승으로 꺾고 199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91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10월 9일부터 10월 13일까지 모두 4경기를 벌여, 해태 타이거즈가 빙그레 이글스를 4승 무패로 제압하고 통산 여섯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MVP에는 한국시리즈에서 15타수 7안타 8타점의 활약을 펼친 해태의 포수 장채근이 선정됐는데 빙그레는 주전 유격수 황대연이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연습 도중 허리를 다쳐 시즌을 마감해[1] 내야수비에서 허점을 드러내 3번째 준우승에 그쳤다.

1차전
10월 9일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1차전 선발카드는 선동열과 한희민. 당시 빙그레의 선발은 한용덕(17승 6패 방어율 2.23)이 예상되었으나 김영덕 감독이 맞불작전을 피하고자 한희민을 등판시켰다. 빙그레는 2회초 강정길의 솔로홈런으로 앞서갔으나, 해태는 2회말 한대화의 역전 투런홈런과 장채근의 적시타로 가볍게 뒤집기에 성공하였다. 빙그레의 추격도 매서웠으나, 김성한과 이순철이 그때마다 적시타를 때려내 추격 의지를 꺾었다. 1990년 삼성과 벌였던 플레이오프 악몽을 잊지 않고 있던 선동열은 비록 4실점을 하였으나 9회까지 마운드를 지키며 팀의 9대4 승리를 이끌어낸다.

2차전
10월 10일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
2차전은 6승의 김정수와 17승의 한용덕이 맞붙었다. 빙그레는 1회 장종훈의 우전안타를 이건열이 어이없는 알까기 실책을 범한데 힘입어 선취득점에 성공한다.2회에는 이강돈과 김상국의 연속안타로 1점을 추가, 김정수를 강판시킨다. 투수를 이강철로 바꿔 추가 실점을 막은 해태는 바로 반격에 나섰다. 2회말 1점을 추격한데 이어 이건열이 3회와 5회 연타석 홈런을 기록, 역전에 성공한다. 빙그레는 김인권을 마운드에 올려 실점을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2루타 2개,단타 2개, 볼넷 2개를 묶어 4점을 더 헌납, 승부가 결정났다.

3차전
10월 12일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3차전은 송진우와 문희수의 대결로 펼쳐졌다. 빙그레는 2회말 강석천의 적시타로 먼저 앞서 갔다. 이러는 사이 송진우는 해태 타선을 7회까지 무안타 무사사구로 틀어막으며 퍼펙트 게임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8회초, 해태는 2사후 정회열을 대타로 내보냈고, 그는 볼넷을 얻어내며 송진우의 퍼펙트를 깨뜨린다.이어 홍현우가 좌전안타를 터뜨리며 노히트노런마저 깨뜨린 뒤, 장채근이 2타점 2루타를 날리며 역전이 됐다. 전의를 상실한 송진우는 윤재호에게 우월 3루타까지 허용하며 3실점으로 강판된다. 이어 이건열이 릴리프 장정순으로부터 쐐기 적시타를 때려내며 해태는 우승을 눈앞에 뒀다.

4차전
10월 13일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4차전 역시 빙그레가 선취점을 따냈다. 빙그레는 1회말 이정훈의 솔로홈런, 4회말 임주택의 좌중월 3루타로 2대0으로 앞섰다. 그러나 해태는 8회초 무사1, 2루에서 양회열타석에 대타로 등장한 김태완이 번트를 대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좌중간을 꿰뚫는 2루타를 터뜨려 순식간에 동점을 만들었고 김태완 자신은 보내기번트와 후속땅볼로 홈인, 3 대 2로 역전에 성공했다. 승기를 잡은 해태는 주저없이 송유석에 이어 선동열을 투입, 1점차 승리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손쉽게 원아웃을 잡은 선동열은 조양근에게 좌월 2루타를 허용하더니 2사후 강석천에게 좌월 2점홈런을 얻어맞고 말았다.4 대 3 빙그레의 역전 리드. 8회초 해태의 대공세를 잠재우고 8회말 반격으로 승리투수의 요건을 갖춘 한희민은 1이닝만 무사히 넘기면 시리즈의 운명결정을 잠실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선두 한대화에게 포볼과 2루스틸을 허용한 한희민은 성균관대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장채근에게 중전적시타를 맞아 기어이 4 대 4 동점으로 몰리고 말았다. 후속 실책으로 1사1, 2루의 찬스가 돌아오자 이순철은 기어이 좌중간적시타를 터뜨려 스코어는 5 대 4 해태 리드. 그리고 선동열은 9회말 마지막 타자를 스탠딩 삼진으로 잡아내며 해태의 V6를 알렸다.

 

 

2000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에 선정

 

김대중[金大中,1924.1.6~2009.8.18]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한국의 정치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9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24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다. 호적상 출생일은 1925년 12월 3일(음력)이다.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1967년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 8일 도쿄[東京]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 귀국하여 김영삼(金泳三)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19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김종필 총재)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향상 그리고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3년 - 서울2호선 신당역에서 지하철에 끼인 사람을 지하철을 밀어서 빼낸 대표적 미담 사례인 '신당역의 기적'이 탄생했다.

 

 

 

 

2016년 - 경부고속도로 언양분기점 관광버스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2016년 경부고속도로 관광버스 사고는 2016년 10월 13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언양 분기점에서 울산 나들목 방향으로 가는 관광버스가 가드레일과 충돌한 뒤 화재가 발생한 사고이다. 이 사고로 10명이 사망하고 중상자 1명을 포함해 7명이 부상당했다
2016년 10월 13일 22시 10분에 울산 태화관광 소속 관광버스가 과속상태로 1차로에서 주행하다 2차로로 급격히 차선을 변경하였고, 이로 인해 차량이 균형을 잃어 방호벽을 3차례 충격하였다. 이때 마찰열로 생긴 불꽃이 연료탱크로 옮겨붙어 화재가 발생하였다. 22시 19분에 선착대가 도착하여 화재 진화와 인명구조를 실시하였으며, 22시 40분에 초기 진화를 완료하고 23시 1분에 화재를 완전히 진압한 후, 10월 14일 3시 35분에 도로의 통행이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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