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국사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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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오늘의 한국사 10월 8일

by the Jungs 2020. 10. 8.

오늘의 한국사 10월 8일

1994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완간

박경리[朴景利,1926.10.28~2008.5.5]

대하소설《토지(土地)》를 쓴 소설가. 이 작품을 26여 년간 집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뤘다.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5년에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을 《현대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단편 《전도(剪刀)》 《불신시대(不信時代)》 《벽지(僻地)》 등을 발표하고, 이어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 《파시(波市)》 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9년 6월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에 5부로 완성된 대하소설 《토지(土地)》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의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영어·일본어·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호평을 받았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수상하였고,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주최한 20세기를 빛낸 예술인(문학)에 선정되었다.

그밖의 주요작품에 《나비와 엉겅퀴》 《영원의 반려》 《단층(單層)》 《노을진 들녘》 《신교수의 부인》 등이 있고, 시집에 《못 떠나는 배》가 있다.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되었으며 시인 김지하가 사위이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2008년에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90 무용가 한영숙 사망

 

한영숙[韓英淑,1920.2.2~1989.10.7]

한국의 무용가. 한성준으로부터 춤을 배웠고 한영숙고전무용학원을 개설하여 한국무용을 전수하였다. 미국과 일본 등에 순회공연을 다니고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살풀이춤을 선보이며 한국무용을 세계에 알렸다.

충남 천안 출생. 12세 때인 1933년 홍성 갈미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상경, 1942년까지 경성 조선고전음악무용소에서 춤을 배웠다. 같은 시기에 한국무용의 중시조라 할 한성준(韓成俊)으로부터도 춤을 배우기 시작하여 승무 ·학춤 ·태평무 ·살풀이 등을 전수받았고, 이와 함께 해금 ·가야금 등의 국악기도 익혔다. 1937년 서울 부민관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져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942년 한성준 추도공연을 가졌다. 그해 한영숙고전무용학원을 개설하여 승무 ·살풀이 ·태평무 ·학무 등을 후진에게 전수하였다.

1963년 미국 30개주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무용극 《법열곡》을 발표하였으며, 1972년 일본 삿포로[札幌] 동계올림픽 파견공연 및 뮌헨올림픽 파견공연을, 1975년 광복 30주년 일본 순회공연을 가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폐막식에서 살풀이춤으로 한국춤의 진수를 세계에 알렸다. 외형적인 기교보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한국무용의 정수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한국무용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1969년 승무로, 1971년 학춤으로 각각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0년 국민포장 대통령장,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08 구세군 대한본영 창설

구세군대한본영[The Salvation Army Korea Territory,救世軍大韓本營]

1908년 영국 구세군 사관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 정령(正領)이 창설한 구세군 한국본부.

1907년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일본 집회 때, 여기에 참가한 한국인 유학생들의 요청으로 1908년 서울 정동에 한국 구세군의 첫번째 영문(營門:구세군교회)이 문을 열었다.

초대 한국 사령관인 영국인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 한국명 허가두) 정령(正領)은 8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 78개소를 개척하는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었다. 1910년 구세군사관학교의 모체인 성경대학을 개설하여 사관을 배출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에는 영문 170개소, 사관 218명, 평신도 9,000명으로 그 교세가 늘어났다.  

1909년 《구세신문》을 발행하고, 1920년에는 사관지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출판활동을 벌였으며, 1916년 29명의 걸인 아동을 돌보는 ‘남자실업관’(서울후생학원)을 시작으로 사회사업에 뛰어들었다. 연이어 빈민 숙박사업, 여자육아원(혜천원), 여자부양소(서울여자관) 등을 신설하고, 각종 재해구제 및 태풍수해 구제, 지붕개량사업, 급식사업, 의료선교사업 등을 벌였으며, 이를 위해 1928년 자선냄비를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한동안 교세가 약해지는 듯하였으나, 광복 후 활발한 활동으로 다시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본영을 옮기고 피난민을 위한 급식사업, 구호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때 많은 사관들이 순교, 또는 피살되거나 납북당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1960년대 현재의 신문로(新門路) 구세군회관을 신축하고, 1970년대 한국인 사령관 전용섭(全龍涉)이 취임하면서 한국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과 개척운동 및 자급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85년 과천으로 구세군사관학교를 이전하고, 1987년 사관연장교육으로 ‘구세군사관학교’를 창설하였다. 1989년 전국 구세군 정교연합회를 발족하고, 1996년 평신도 지도자 육성을 위한 ‘권역별 수련원’을 개설하였다.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130 (정동)에 있다.

 

1895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

조선 말기 제26대 왕 고종의 비(妃)로 고종의 황제 즉위 이후 명성황후라 칭해졌다.


출생과 왕비로 간택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閔)씨이며,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변에 알려졌다. 16세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이하 비)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씨로부터 완화군(完和君)을 얻고 비를 돌보지 않았으나 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비는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졌고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에 원자가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을 가지고 대원군과 더욱 대립하였다. 비는 대원군의 반대파인 민승호,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 그 아들 재면(載冕),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대원군의 반대 세력인 김병국, 조두순, 이유원 등을 규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흥선대원군과 갈등
마침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 내외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이유로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이를 이용하여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고,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1873).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과 동시에 비 중심의 세력으로 정권을 구축한 뒤, 개방정책을 펴서 일본과 수교하였다(1876).

임오군란으로 피신
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여 민씨 세력이 위협을 당하자 비는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의 집을 거쳐 충주(忠州)·장호원(長湖院)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하였다. 국내가 혼란해지자 고종은 대원군의 힘을 빌렸고, 비가 오랫동안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자 흥선대원군이 중전의 국상(國喪)을 선포하려 하였다. 이때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했고, 민씨 중심의 정권이 다시 수립되었다.

친청정책과 개화파와 갈등
1884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심상훈(沈相薰) 등을 통하여 청군이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점차 정권을 좌우하고, 흥선대원군에의 복수심을 키우고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치성 명분으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국고를 낭비하기도 하였다.
 
친일세력과 갈등으로 시해됨
일본 세력의 침투가 점차 강화되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일본 낭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다(을미사변 乙未事變). 



폐위와 복권
그 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 1)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황후(明成皇后)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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