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역사 사실 양구일보 배화학당 김동인 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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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역사 사실 양구일보 배화학당 김동인 장지연

by the Jungs 2020. 10. 2.

10월 2일 역사 사실 양구일보 배화학당 김동인 장지연

1434 해시계 '앙부일구' 설치

 

앙부일구(仰釜日晷)는 1434년 조선 세종대왕 16년 이후로 제작·사용된 해시계로, 과학·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었다.
앙부일구는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초기의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아 18세기에 제작된 것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휴대용 앙부일구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로 강건이 제작한 것이다.

《원사(元史)》〈천문지(天文志)〉「앙의(仰儀)」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오목한 화로 크기의 둥근 가마솥 시계판 모양 해를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앙부일구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목한 지구의처럼 생겨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청동을 재료로 하여 주물을 부어 만들고 글자와 선은 흑색칠 바탕에 은상감(銀象嵌)을 하여 뚜렷이 보이게 하였다. 4개의 발은 수평을 맞추기 위하여 수평기준장치를 십자(十字)의 형태로 하였다.

시판은 동지(冬至) 쪽에서 시작하여 하지(夏至)에 이르기까지 24절기를 13선의 위선(緯線)으로 긋고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時刻線)을 그었다. 위도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를 달리하기 위해, 영침(影針), 즉 그림자바늘은 당시 한양에서 사용하던 북극출지(北極出地) 37도 20분에 맞춰서 비스듬히 꽂아서 사용하였다.

당시의 시간은 12간지로 표현을 하였으며, 시간의 단위가 12이기 때문에 2시간이 한 묶음의 시간이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을 그림으로 그려 1434년 11월 2일(음력 10월 2일)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앞에 설치를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사라져 세종시대 앙부일구는 남아있지 않다 . 그 후 조선시대 말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궁궐과 관공서, 사대부 가옥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1898 배화학당 설립

 

1898년 10월 기독교 전파와 여성교육을 목적으로 미국 남감리회(南監理會) 여선교부의 캠벨(Josephine P. Campbell) 선교사가 한성 인달방 고간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교사를 마련하고 캐롤라이나학당으로 설립하였다. 캠벨은 우리나라에 내한한 최초의 여선교사였으며, 학당의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아이들이 낸 선교기금이 학교 설립 자금으로 일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칭해졌다.
당시 발간된 『여학교사(女學校史)』·『여학교지(女學校誌)』에 의하면 다른 근대 여학교와 마찬가지로 배화학당 역시 초창기 학생 모집과 학교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최초의 학생은 두 명의 여학생과 세 명의 남학생이었는데, 두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은 미국 남감리회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리드(C. F. Reid)의 사택에서 수위를 보던 박(朴)씨의 딸이었다.
또한 캠벨이 학당의 기숙사를 돌아볼 때면 어린 탓에 이부자리 위에 오줌을 지린 학생도 있곤 하였다. 처음에는 학교라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단급(單給)으로 교사는 2명뿐이었고, 교과목도 국문과 한문에 국한되었다.
이후 1902년부터 기숙사생 이외에 통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여 학생 수가 30명으로 증가하였다. 1903년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에서 경비를 증액하여 교사(校舍)와 기숙사를 증축하면서 중학교 예비과를 설치하였고, 1910년 4월 2일 배화학당으로 교명을 개칭하고, 4년제의 중학과와 4년제 소학과를 병설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사는 모두 여선교사들이었는데, 이는 당시 남녀유별의 풍속에서 여자가 남자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문 담당만은 남자 선생이 맡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남자 선생은 여학생을 마주 보고 가르치지 못하고, 항상 뒤로 돌아앉아 여학생이 묻는 것에만 대답을 해주거나 교사와 학생 사이에 병풍을 치고 수업이 진행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교육구국의 일념으로 교육 현장에 뛰어들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1910년 10월 배화학당에 교사로 부임한 한서(翰西) 남궁 억(南宮檍)이었다.
남궁 억은 배화학당에서 8년 동안 재직하면서 여학생들에게 남학생 못지않은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특히 배화학당의 교가를 작사하고, 여학생들에게 무궁화 13송이로 우리나라 지도와 태극기를 수놓게 하였다.
그 후 이 무궁화 수본과 태극기 수본은 차츰 우리나라 각 가정에 보급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일조하였다. 3·1운동 때 배화학당 학생들의 활동이 컸던 것은 남국 억의 민족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 개편되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배화고등여학교를 비롯한 기독교계 학교는 이에 저항하였고, 계속되는 일제 당국의 탄압에 1940년 선교사들 대부분이 본국으로 철수함에 따라 배화고등여학교도 심한 경영난에 봉착하면서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관리들은 매일같이 배화고등여학교에 드나들면서 유지재단을 설치하지 못하겠거든 경영권을 포기하라고 압박했고, 이에 교사로 있던 이덕봉(李德鳳)과 이만규(李萬珪)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여성 독지가 이민천(李閔天)이 춘천·이천·연기·익산 등지에 있는 전답과 대지 등 토지 106만 6,820㎡(32만 1,723평)을 기부함으로써 배화고등여학교는 폐교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3년 배화여자소학교를 경성여자배화학교로 개칭하였으나, 1945년 9월 경성여자배화학교를 폐교하고 재적생은 종로국민학교에 배속시켰다. 배화고등여학교는 1946년 배화여자중학교로 개편되고, 이어서 1951년 8월 배화여자중학교와 배화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00 소설가 김동인 출생

 

김동인(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 호는 금동(琴童) 또는 춘사(春士),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이다.

소설로는 〈배따라기〉, 〈감자〉, <명문>, 〈광화사〉, 〈붉은 산〉, 〈운현궁의 봄〉, 〈광염소나타〉가 있다. 김동인 소설의 특징은 경향성이 무척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전혀 공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반된 특성이 한 사람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감자〉와 〈명문〉에서는 자연주의, 〈광염소나타〉와 〈광화사〉, 〈배따라기〉에서는 탐미주의, 〈붉은산〉에서는 민족주의, 〈발가락이 닮았다〉는 인도주의 경향이 발견되는데 서로 다른 경향성이 한 작품에 깃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1900년 10월 2일에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대윤은 평양의 대부호이자 장로교 장로였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개신교 계통의 미션스쿨인 승덕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2년 역시 개신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중퇴한 후 1914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학원 중학부에 입학했다.

1915년 도쿄학원의 폐쇄로 메이지학원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경제관념이 지독하게 없던 그는 사치벽으로 재산을 탕진해버린다. 그는 언제나 최고급 옷과 구두를 맞춰 입고 백금 시계에 백금 시곗줄을 달아 차고 다녔으며, 갖은 희귀한 꽃과 고급 그릇 수집을 취미로 삼았다. 경마, 마작 등 도박에도 몰두했으며 낮에는 고급 요정 명월관에서 기생 수십명을 부리고, 밤에는 프린스 호텔에서 또 여자들과 놀아나며 돈을 펑펑 썼다. 일본도 제 집 앞마당 드나들듯 수시로 놀러다녔으며, 담배 한 갑을 사려고 중국에서 신의주까지 인력거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선친이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까먹던 김동인은 1920년대 후반에 보통강 수리사업에 뭣도 모르고 투자했다가 쪽박차고 그 많은 재산은 물론이요 선친이 남겨준 400평짜리 대저택도 모조리 날려먹었다. 가뜩이나 난잡한 김동인의 오입질에 생활고까지 겹치자 첫 번째 부인 김혜인이 결국 가출해 버려 졸지에 이혼남이 되었다.

그와 동시대 문인이었던 현진건의 경우는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대가로 가난에 찌들면서까지도 문학가로서의 지조를 지키기도 했다. 아니면 황순원처럼, 친일 글을 쓰느니 차라리 글을 발표하지 말자며 잠수를 타 버린 경우도 있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이효석같은 경우는 친일 행적이 있지만 2차대전 와중에 가난과 질병 속에 시달리면서 정말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고, 그 자신도 지인들에게 친일행위를 부끄러워하는 말을 했다. 또한 알고 지내던 문학평론가 이갑기로부터 "드디어, 네놈도 개가 다 되었구나?라는 욕설을 듣고 당장 일자리를 때려친 사람이다. 채만식같은 경우는 자신의 친일행각에 대해 뉘우치고 반성하는 의미로〈민족의 죄인〉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 역시 가난에 찌들어 6.25 전쟁을 2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평생 소원이 원고지를 넉넉하게 가져보는 것이었다고. 최서해도 말년에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을 맡았지만, 최서해의 가난한 형편이 잘 알려져 있었기에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의 문인들마저 욕하지 않았을 정도. 반면 김동인은 일제에 아부하지 않아도 될만큼 재력이 있었으나 본인의 방탕한 사생활탓에 가난해졌고,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을 시작했기에 모양새가 굉장히 추하다.

메이지 학원을 중퇴한 뒤 같은 해 9월 다시 일본 도쿄의 미술학교인 가와바타 화숙(川端画学校)에 입학하여 서양화가인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문하생이 되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그녀")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이광수의 작품이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그 뒤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1 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구속되었다가 6월 26일 풀려났다.

1920년대부터 가세가 몰락하면서 대중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시어딤 창작집'(창조사)을 자비로 발간했다. 1924년 8월 동인지 '영대'를 창간하여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있어 소설가 김동인의 미덕은 쉽고 재미있게 쓴다는 점이다. 2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근대 문인 중에서도 윗세대로 꼽히는 인물인 그의 작품들은 2010년대에 현대 한국어 표기법으로 바꾸지 않고 그냥 읽어도 이해하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1930년에 광염소나타 발표. 또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실각한 흥선대원군을 돕는 젊은이들을 다룬 가상역사물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순수창작물이 아니다. 일본 닌자소설을 번역한 다음 배경 바꾸고 살을 덧붙인 작품이라서 기승전결이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다. 어떻게보면 습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여기서 키운 실력으로 최고작 운현궁의 봄을 집필한다. 1932년 7월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위원 및 사업부 책임자를 맡았다. 1933년 4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월간잡지 '야담(野談)'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발간했다.

1938년 쯤에는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견훤>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재출간도 이루어지지 않아 구하기 어려운 소설이 되어버렸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한국 최초의 SF작가로 유력한 사람이다. 1929년에 발표한 <K박사의 연구>가 한국 최초의 창작 SF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SF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뜸해서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한국 SF의 역사를 논할때 반드시 거론되는 작가이다. 한국 SF에 대한 학술연구는 복거일 정도를 제외하면 작가, 작품별 연구보단 도입사, 변천사, 장르 자체에 대한 연구 위주로 주로 석박사 수준에서 논의된다. 지속적으로 창작활동을 한건 아동 SF문학가인 한낙원을 제외하면 복거일이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문제 많은 성격탓에 이광수, 염상섭을 비롯해 원수진 사람이 정말 많았지만 제자 정비석에게는 무척이나 자상했다고 한다. 정서죽에게 비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김동인이었으며 정비석이 쓴 소설들은 하나도 빼지 않고 열심히 검토해 주었고, 예술이 나니 통속소설을 쓰는 것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똑같이 친일하는 김억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염상섭과 앙숙이 된데는 김억이 염상섭과 먼저 사이가 나빴던 탓도 컸다. 의외로 카프 작가들과는 사이가 괜찮았는데, 카프의 유사 소설가들 사이에서 거의 유일한 제대로 된 문인이었던 이기영을 발굴하는데 공헌했다.

친일 행적

일제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변절하였다. 1939년 2월 초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3월 위문사(문단사절)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박영희, 임학수와 함께 뽑혔고,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하여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겨 자랑스러웠다고 글을 썼다.(...)

이 시기를 즈음해서 이 항목 최상단에 언급된 것처럼 히가시 후미히토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다. 이후 히가시는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년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 간담회에 출석하여 발언하였고, 같은해 12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했다.

일제로 완전히 넘어간 1942년의 후미히토도 일제에 의해서 체포된 적이 있긴 하다. 그렇다고 이게 무슨 독립운동 흔적이라도 보여줘서 그런 것은 아니고, 천황이 헌법상의 기관일 뿐이라는 내용을 언급하면서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정설은 천황은 그냥 신이다였기 때문에 후미히토는 천황불경죄로 체포되어서 8개월간 구금된다. 이 사건 이후로 후미히토는 더더욱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후 후미히토는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하에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 협회, 조선센류 협회, 국민시가연맹등 4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보국회로 출범하자,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그외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년 1월 20일에 조선인 학병이 첫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학병권유를 연재하면서 선동했다.

이 밖에 후미히토는 친일소설이나 산문 등을 여러편을 남겼다. 메이지 유신을 지지했다고 하는 일본인 야나가와 세이간을 다룬 소설 '세이간의 길'은 연재가 중단되었으나, 임종국이 평가한 조선의 역사소설은 마침내 김동인에 의해서 조선 역사를 버리고 일본 역사에서 취재한다는 난센스’라는 표현으로 충분할 것 같다. 실제로 완결된 대표적인 소설이 바로 백마강이다. 이는 백제 멸망 이후에 일본군이 백제부흥군을 보냈다가 박살이 난 백촌강 전투를 다룬 소설로, 이 소설을 쓴 이유를 후미히토 스스로 내선일체의 성지 백제를 배경으로 신체제에 즉응하여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만들고자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서 부여신사(夫餘神社)를 만들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후미히토는 세월이 오고가는지도, 세상이 바뀌는지도 모르고 일제가 패망했다는것조차 모른채 오전 10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정오에 일본이 항복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이 청탁을 거절했다.

광복 이후

8월 17일 임화와 김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으나, 18일 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에는 회원에 가입되어 있었다. 같은 해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現 중구 약수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이듬해 1946년 1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래 반탁 운동에도 적극 활동하여 '반공투사 애국자'로 둔갑했는데, 여기서 박헌영과 여운형, 김규식 등 신탁통치안에 찬성이나 신중론을 주장했던 세력들을 '매국노'라고 대차게 비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불하받은 적산가옥이 미군 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했다.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를,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연재했다.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일제 강점기에 저질렀던 수 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변명하는 등 논조를 썼다. 그 주요 내용은 "일제말기의 친일 행위는 민족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 행위'"라고 자기 스스로 미화한 것이다.(...)이 짓은 이무영도 했다

이 사람이 '백담비'에 관한 이야기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백담비는 자신의 하얀 털을 너무나도 사랑하여 흙탕물은 길을 돌아가는 수가 있더라도 피하지만 일단 한 번 더럽혀지면 자포자기하여 흙탕물에서 이리저리 뒹군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김동인의 삶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말년

말년에는 한국의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중국의 삼국지 못잖은 대작을 써보겠다는 취지로 역사소설 을지문덕 집필에 들어갔으나 1949년 7월에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30쪽 정도를 집필하는데 그쳤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서 피난을 떠났으나 이미 중풍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그를 뱃사공이 태우길 거부하면서 왕십리 자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택에 돌아와있던 그를 잡으러 붉은 완장들이 여러차례 찾아왔으나 이때 김동인은 혼자선 식사도, 용변도 할 수 없는 산송장이었다. 말도 못하는 사람 잡아들여봐야 심문도 무리고 둬도 곧 죽을 게 뻔해서 그냥 돌아갔다. 그렇게 위태위태한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1.4 후퇴 다음 날인 1951년 1월 5일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병으로 쓸쓸히 사망했다. 당시 부인 김경애가 자녀들을 피난 시키기 위해 집을 비워서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없다.

사후

1955년에 '사상계'가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이후 동인문학상은 1956년부터 1967년까지는 사상계사, 1970년에 사상계가 망한 후 중단되었다가 1979년부터 1985년까지 동서문화사, 1987년부터는 사상이 정 반대인(...)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매년 시상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김동인의 친일 논란에 가장 정색하고 반론하고 있다. 1977년에 그의 흉상과 문학비가 서울 인왕산 아래 사직공원에 제막됐다가 1988년부터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근처 빈 터로 이전됐다.

그 밖에 제헌국회의원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동원의 이종사촌관계가 된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한, 국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그의 이름이 포함돼있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산하 기구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 김동인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수록되었을때, 그의 아들이 이의제기를 걸었다. 이의제기를 건 근거가 '1942년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어 수감되었던 것'을 제기한 것인데, 2010년 11월 26일 재판부에서 김동인의 친일 행위를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1944년 1월16~28일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을 10회 연재했고, 20일 ‘일장기 물결-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징용을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매일신보는 유일한 우리글 일간지로, 게재 횟수가 11회에 이르는 점 등을 비춰보면 김씨가 전국적 차원에서 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1920 '시일야 방성대곡' 장지연 사망

장지연(張志淵, 1864년 11월 30일 ~ 1921년 10월 2일)은 대한제국의 애국 계몽 운동가 겸 언론인이었다. 본명은 장지윤(張志尹)이며 아호는 위암(韋庵)이다.

생애
생애 초반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 6월 향시 응제과에 합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다. 이후 3~4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1894년 식년시 진사로 합격했으나, 이무렵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관직에 임명되지는 못하자,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낙향하여, 이후 후학 양성과 계몽 운동을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짓고 독소(讀疏)를 맡았다. 1897년 7월 사례소 직원에 임명되었고, 9월부터 내부주사를 겸직하다가 1898년 10월에 의면했다.

언론, 독립운동
1898년 4월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는데 참여했고, 9월에는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의 주필을 지냈다. 같은 해 9월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어 취임했으나 수개월 후 그만두었다. 1900년 10월 '시사총보'를 출판사인 '광문사'로 개편, 설립할 때 참여해 편집원을 맡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흠흠신서'등을 간행했다. 1901년 봄 다시 황성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02년 8월에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3월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개선을 촉구하는 '정치경장에 관한 주요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

을사 조약 전후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윤치호,이달용등과 함께 일본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같은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사흘 후인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투옥되었다. 을사조약을 규탄한 〈시일야방성대곡〉은 1905년 11월 27일 대한매일신보 에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되어 기사로 나갔다. 이후 코리아데일리뉴스, 재팬크로니클 등의 언론이 이 명문을 인용했다. 한편, 장지연이 사장직에 있던 황성신문은 통감부의 압력에 압수되었고 1906년 2월 12일 정간되었다.

1906년 1월에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장지연은 교육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나아갔고,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등을 조직하여 친일단체 일진회와 정면 대립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생애 후반
1908년 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며 1년가량 머물렀고, 귀국하여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이 신문은 1910년 경술국치 체결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 복간되는 과정을 거쳤다.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에게서 그에게 공직을 제의했지만 그는 사양하였다.

1918년 매일신보에 그의 이름으로 사설이 실린 것이 마지막 글로 그 이후부터 장지연은 병으로 요양하던 중 1919년 4월 경남 양산을 유람했다. 1921년 1월에 병을 얻었으나 회복되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했지만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친일 행적 의혹 논란
경술국치 이후 장지연은 이 황현의 절명시 필화 사건 이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시와 매일신보에 논설 주필로 있었고 730여편을 기고했다고 한다. 매일신보 기고 활동은 1914년 말부터 1918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려 조선인은 단결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장지연이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일제강점기 경남일보사의 내부분열로 신문사를 퇴사한 이후 조선총독부 인사인 아베 미쓰이에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보는 그 당시에도 유림,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 장지연 본인은 "1.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2. 작성 원고는 일사, 유사, 종교 풍속 등의 내용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등 세 가지 조건에 입각해 매일신보에서 활동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그의 논설글이나 작품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적인 언론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1914년~1918년 사이 총독부 어용신문사 매일신보에 주필로 활동하여 700여편의 친일한시 및 사설을 게재했다는 의혹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다. 또한 국가보훈처에서 운영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름이 빠졌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 오른 이들 가운데 논란이 많은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논란의 이유로는, 오랫동안 교과서 등을 통해 알려진 통념에 배치된다는 점, 경술국치 이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활동했다는점, 지방에서 기고 위주로만 활동하면서 말년의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 일반적인 전향 친일 인사들이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사건이나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압박과 같은 계기를 통해 집단으로 친일파로 방향을 바꾸는 데 반하여 1910년대 초반에 특별한 동기가 알려진 바 없이 이미 일본 천황을 찬양하고 총독을 칭송하는 행적을 보였다는 점, 친일 증거물 중 그가 쓴 것으로 의심 받는 《경남일보》의 시나 기사에는 기명 기사를 내지 않는 관례 때문에 글쓴이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장지연의 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 등이 있다.

최근에는 장지연이 말년에 '1921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지휘했다.'고 기록한 일본 외무성 문서가 발견되었다. 1921년 5월 5일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러시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이끈 "김경천의 초대로 온 장지연이 주우찌하(블라디보스토크 인근으로 추정)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다.

이 문서 자료를 발굴한 연세대학교 국문과 박애경 교수는 "매일신보 기고자였던 장지연을 매일신보 기자라고 오기한 측면은 있지만 이름이 정확히 일치하고, 매일신보를 언급했다는 측면에서 엉뚱한 사람을 장지연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자료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수원대학교 박환 교수는 "불령단관계잡건이 신빙성 있는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노령의 장지연이 의병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려면 일본 병무청 문서 등 다른 신빙성 있는 자료와 비교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며 위암이 말년에 의병활동했는지에 대한 진위여부 논란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친일 논란으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이 취소되었으나, 2012년 법원에서 서훈취소 무효 판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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